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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 2DAY

문학으로 힐링! 술과 어울리는 시집 - 어느 흐린 날 나는 주점에 앉아 있을거다. - 황지우 시인

요즘 [힐링]이라는 말이 도처에 유행입니다. 몸이나 마음의 치유.
그것을 찾아 멀리도 여행을 떠나셨겠지요.
아니면, 마음을 읽어줄 그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진단을 받아보기도 했겠지요.

오늘 서울의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무래도 하루 종일 비님이 내리실 모양입니다.
여름휴가의 끝자락을 떠나, 이 빗줄기를 따라, 지리하던 무더위도 이제 곧 물러나시겠지요.

어느 흐린 날 나는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흐린 날씨의 가을입구

이럴 때에는 책, 그 중에서도 특히 시(時)로 하는 힐링을 추천합니다.
시라는 존재가 읽는 사람, 장소에 따라, 그 상황이나 시점에 따라 그 의미들이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에.
충분히 짧은 시간을 투자하고도 스스로 자가 치유가 가능 하지요.

책꽂이를 손끝으로 쓸며,
오늘의 이 흐린 날씨, 그리고 술과 참 잘 어울리는 시집 한 권을 골라봅니다.
황지우 시인의 [어느 흐린 날 나는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1998, 문학과지성사.
 

 


저에게는 백 번을 읽어도 백 번이 다른, 질리지 않는 맛이 있는 그런 시집입니다.
그리고 읽을 적마다 왜 그렇게 술 한잔의 생각이 간절해지는지요.
아니..
매번 읽으면서 시에 먼저 취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록색 표지를 넘기다, 시인 황지우와의 첫대면을 추억해봅니다.
황지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너를 기다리는 동안> 이라는 시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꽤나, 기다림에 대한 사명감에까지 사로잡혔었던 했던 저는
이 절실한 기다림의 표현이 마치 제 이야기처럼 들려, 이 시를 읽고 또 읽었더랬습니다.


특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너를 기다리는 동안 中]
라는 구절에서는 이 절실한 기다림의 표현에 제 감정이 폭풍처럼 이입되었었지요.

설레임과 기대감, 그리고 이어지는 실망감이 이 짧은 언어들로 어찌 이토록 담담하게 녹여냈을까요.


화려한 유희는 없지만, 현실과 그리 멀지 않은 소재, 심정의 표현으로
그가 풀어낸 감정의 언어에서 저는 ‘황지우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적이고 철학적이며, 뭔가 염세적일 것 같지만 종종
감출 수 없는 서정의 힘이나, 거북스럽지 않은 시대의 풍자논리를 풀어주는 사람.
그래서인지 유독 황지우의 시를 읽은 날에는 쓸쓸하면서 즐거운 기분이 듭니다. 


[뼈 아픈 후회],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와 같은 작품에서는
시인의 현재였던 민주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늙어가는 아내에게]나, [소파에 대한 日記] 에서는
아내와 자신을 그 주변인물로 표현하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장면 속에 함께 공존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능력도 보여줍니다.


저는 언젠가 [늙어가는 아내에게]로 청혼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습니다.
시가 주는 그 장면에 너무 몰입을 했던 탓도 있겠지만,
누군가 ‘저와 같은 병이 걸리고 싶다’ 말하며
굳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먹이지 않고도
모든 감정과 약속을 읽어낼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란 적도 있었습니다.

술 한잔과 시 한수를 따르는 밤


오늘은 황지우처럼 움직이고 싶은 날입니다.
추억을 공유하는 옛 사람들을 만나 조건도 이유도 없이
맑은 소주한잔 기울이고 싶습니다.
살뜰한 사람을 만나, 내 인생의 푸념이나 내 갈 길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지나온 날들과, 지났어야 좋았던 날들과, 지났기에 웃을 수 있었던 그 사건들에 대해서.
시간이 준 처방전대로 대수롭지 않은 듯 시담 한 귀 나누고 싶은 날입니다.

어느 흐린 날 나는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어느 흐린 날, 저는 그렇게 주점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등 뒤로 흐르는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 <어느 흐린 날 나는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