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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2DAY

눈물처럼 동백지는 선운사를 찾다

아침부터 안개가 뿌옇게 내려 앉은, 5월의 아침입니다. 간간히 두터운 안개를 뚫고 옅은 햇볕이 비쳐 듭니다. 안개로부터 햇살로 이어지는 5월의 아침을 달려 KTX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 곳을 생각하면 노래 한 자락이 귀에 맴도는 곳,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 곳. 송창식 님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선운사가 오늘의 목적지입니다.

기차가 남쪽으로 달려갈 수록 햇살이 선명해 집니다. 먼저 도착한 곳은 정읍. 이 곳에서 관광 버스를 타고 고창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마침 고창은 청보리밭 축제가 한창이군요. 버스가 정차한 바로 그 곳에서 푸르게 펼쳐진 들판을 아래로 굽어 볼 수 있습니다. 푸른 보리밭 풍경에 눈이 다 시원해지는 느낌… 가을에는 메밀을 심어 메밀꽃이 흐드러진다고 하니, 봄이면 봄대로, 가을이면 가을대로 계절색을 드러내는 공간이지 싶었습니다.


섭씨 30도에 육박하는 때 이른 5월 더위의 날씨였지만 가끔씩 보릿대가 ‘쏴’ 하고 밀릴 정도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더위는 금세 잊혀집니다. 보리밭 바깥쪽에서 열리는 여러 행사들이 고창의 특산물을 소개합니다. 고창하면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복분자. 부모님 드릴 복분자 한 병을 샀습니다. 색다른 보리와플은 어른들도 한 입씩 돌려 먹었고 보릿짚 공예품 전시회에선 예상치 못했던 섬세한 작품들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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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버스에 올라 30여 분을 달려 선운산 도립 공원에 이르렀습니다. ‘선운’이란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이고, 선운산은 도솔산이라고도 불리는데 ‘도솔’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의 뜻이라고 하는군요. 바로 이 선운산에 백제의 검단선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천년 고찰 선운사가 잇습니다. 현재 선운산에는 도솔암, 석상암, 동운암, 참당암이 있지만 옛날에는 89개의 암자가 골짜기마다 들어섰다고 하니 당시 선운사의 위용을 짐작할 만합니다.



선운사로 들어가는 길 왼쪽에 내천이 흐르는데, 내천 건너편 절벽 아래쪽에는 천연기념물 367호인 송악이 바위에 붙어 자라는 신기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모습을 관찰하려고 바짝 다가가서 보았는데 이상하게 우리 말고는 아무도 얼씬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송악 나무 밑에 있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는 말이 있답니다. 더 나빠질 머리도 없잔아, 우스개로 마음을 댤래 봅니다.


선운사에 이르니 사천왕상이 서 있는 천왕문이 마치 반가의 대문처럼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대웅전을 돌아 뒤쪽으로 올가가니 노래 가사로만 알던 동백나무 숲이 마치 병풍처럼 절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선운사의 동백은 다른 곳의 동백보다 늦게 피어 ‘춘백’이라고도 합니다만, 이미 5월……. 꽃은 거의 다 졌지만 그나마 반갑게도 애기 얼굴처럼 귀여운 동백꽃 몇 송이가 빼꼼 얼굴을 내밀어 나를 맞아줍니다. 이런 동백꽃이 3,000여 그루에서 핀다고 상상하니 다음 번엔 개화 시기를 맞추어 와야 겠습니다.


선운사를 나와 이제 도솔암까지 총 3.2km의 길. 우리는 보행자용 산책로를 택했다. 흙냄새, 나무냄새가 코를 상쾌하게 하고 쪼르르 달려가는 다람쥐들이 웃음을 주기는 했지만, 사실 오랜만의 산행(?)이라 조금 덥고 힘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도솔암까지 가는 내내 오른쪽에 펼쳐진 차량용 길을 흘끔거리며 ‘저리로 건너갈까?’ 하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결국 돌아오는 길은, 걷기 쉬운 차량용 도로로 오고 말았군요.



도솔암을 가는 길에 만나는 숲의 신록은 싱그러움 그 자체입니다. 특히 갓난아기 손바닥만 한 어린 단풍잎은 정말 귀여워 여러 번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니까요. 이렇게 즐기며 1시간을 좀 넘게 걸은 뒤에야 도솔암 근처에 있는 진흥굴과 장사송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진흥굴은 신라 진흥왕이 수도한 굴이라는데 굴이 깊지는 않았으나 왠지 아늑한 맛이 있군요. 진흥굴 바로 옆에 있는 장사송은 수령 600년의 나무답게 키가 훌쩍 컸는데 가지가 뻗어나간 모습이 마치 활짝 펼쳐진 부채의 부챗살로 많이 표현되는데 나는 엉뚱하게도 브로콜리가 생각나 살짝 웃고 말았습다.



장사송을 지나 2~3분여를 올라가면 최종 목적지인 도솔암이 나타납니다. 도솔암 왼쪽으로 급경사 언덕을 올라가면 깎아지른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이 있는데 그 크기가 사람을 압도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높이 17m로 우리나라 최대 마애불 중 하나라는군요.  마애불은 가슴에 검단선사의 비결록이 들어 있었다는 전설로도 유명합니다.



여행을 떠날 때 맘껏 설렐 수 있는 까닭은 돌아올 집이 있기 때문일겁니다. 하루의 짧은 일정이었는데도 굉장히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듯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움직인 탓도 있겠지만 익숙한 주변을 떠나 다른 지역의 풍광 속에 있었기 때문, 즉 다른 공간에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돌아 오는 길, 기차 안에서 즐기는 맥주 한 잔이 하루의 피로를 풀어줍니다. 맥주의 톡 쏘는 시원한 쾌감과 그 뒤로 이어지는 은근한 노곤함이 기차의 흔들림에 따라 움직이는 몸의 긴장을 마음껏 이완시켜 줍니다. 하이트의 쿨한 이 맛! 그래, 맥주는 이런 맛이야… 괜스레 흐뭇합니다. 


‘바보는 방황하고, 현명한 사람은 여행한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여행을 많이 하기 때문에 현명해지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지금의 신록이 짙어 푸르러질 겁니다. 너무 짙어져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을 구별할 수 없게 되기 전에 다시 한번 서둘러 기차에 올라야겠습니다. 신록처럼 새로운 ‘현명함’을 하나 더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