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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2DAY

[독일맥주] 연기를 머금은 맥주, 라우흐비어(Rauchbier),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14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연애에 완전히 젬병인 것도 아니고, 남자에게 먼저 고백해보기도 처음이 아닌데, 열다섯 소녀마냥 며칠째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서 밤잠을 설쳤다. 무턱대고 바스티를 찾아가서 ‘나 좋아한다며. 나도 네가 좋으니 한번 사귀어 볼까?’하고 말하기도 쑥스럽기 그지 없고, 그쪽에서 먼저 고백해주길 기다리며 은근한 추파를 던지는 짓도 목구멍이 오글거려서 도저히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다 있는 대로 머리를 쥐어짜 겨우 해낸 생각이란 게, 내 손으로 구운 쿠키였다. 지난 크리스마스 파티에 친구들을 위해 쿠키를 구워갔었는데, 내가 구운 줄도 모르고도 바스티가 제법 맛있게 먹었던 기억 덕분이었다.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Die Deutschen lieben Bier!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둥!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두둥!

준비는 완료됐다. 갑작스런 방문에 대비해, 사전에 전화를 걸어 위치를 파악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바스티는 서너 시간 후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간다고 했다. 도서관이 우리 집 근처라, 그는 책을 빌리거나 반납할 때면 꼭 들렀다 가곤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다. 식탁 위에 올려진 재료를 보고 “쿠키 구워?”라며 룸메이트 잔드라가 주섬주섬 소매를 걷어붙였다. 일단 큰 그릇에 밀가루와 설탕, 버터 한 덩이를 부었다.

물론 맨손으로 버터를 뭉개며 양심의 가책을 살짝 느꼈다. 매번 구울 때마다 느끼지만 쿠키에 들어가는 설탕과 버터의 양은 정말 엄청나다. 뱃살이 찌면 안 된다며 복근도 없는 배를 팡팡 두들기는 바스티의 평소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도 달콤한 음식을 좋아해, 맥주마저 라들러(Radler)를 마시는 그에게 쿠키는 거절하지 못할 선물이 될 터였다.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깨끗이 닦은 식탁 위에 밀가루를 흩뿌리고 차진 반죽을 올렸다. 베이킹에 있어서는 나보다 한 수 위인 잔드라가 먼저 나서서 반죽을 밀대로 얇게 밀었다. 그 다음은 베이킹 틀이다.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우리는 번개 같은 속도로 별과 꽃과 종, 그리고 트리 모양을 찍어나갔다. 웬일로 쿠키를 굽냐고 물을 만도 한데, 잔드라마저 모든 상황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 공감 내지는 응원의 눈빛만 보낼 뿐이다.

두어 판을 오븐에 굽고 나서 두 번째 쿠키반죽에 들어갔다. 이번엔 버터가 두 덩이다. ‘바스티, 미안. 나중에 윗몸 일으키기 할 때 발목 잡아줄게’를 뇌며, 식탁 위에 코코넛 가루를 흩뿌렸다. 조그맣게 떼어 구 모양으로 굴린 반죽에 코코넛 가루를 묻혔다. 그리고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폭폭 두드리면 딸기잼을 담을 구멍이 생긴다. 룸메이트가 딸기잼 병을 열자 “뻥!”하는 소리가 났다. 물을 조금 섞어 중탕한 딸기잼이 반죽 위에 하나 둘 얹혀졌다. 빛깔이 고왔다.

나는 라임액과 슈가파우더를 섞어 밝은 갈색으로 구워진 쿠키 위에 덧바르고 장식을 했다. 몇 시간에 걸쳐 완성한 두 종류의 쿠키가 식탁 위에 주르륵 늘어섰다. 참 보기가 좋다.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시계를 보니 네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올 때가 되었구나 싶어 바스티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신호가 가다가 뚝 멈췄다.
“바스티?”
“응, 이작.”
“어디야?”
“아, 집에 왔는데.”
피시식 김이 빠졌다.
“올 줄 알았더니. 그냥 갔어?”
“전화했는데 안 받던데? 오늘 금요일이라 부모님 댁에 다녀오려고 짐 싸는 중이야.”
재빨리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하필 왜 귀에 들리지 않았는지 바스티로부터 걸려온 전화가 두 통이었다.
“기차시간 맞추려면 나 지금 나가야 하는데. 할 말 있어?”
바스티가 물었다.
나는 애꿎은 쿠키봉지만 한동안 만지작거리다 “아니. 잘 다녀와.”라고 대답했다. 어차피 바스티는 일요일 오후면 돌아오고, 그 동안 다 먹어 치우지 않는 한 쿠키는 도망가지 않으니까. 바스티는 주말 잘 보내라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맥주나 마시자.”
옆에서 아작아작 쿠키를 먹던 잔드라가 군말 없이 윗옷을 건넸다.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라우흐비어(Rauchbier?)”
‘담배를 피우다’라고 할 때 쓰는 독일어 동사가 라우헨(rauchen)이다. 그래도 담배와는 관련이 없겠지 싶었다. 그렇다면 다른 뜻으로 ‘훈제하다’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체 맥주를 어떻게 훈제한단 말인가. 잔드라는 “한 번 마셔봐.”라며 짙은 빛깔의 맥주를 내 앞에 턱 내려놓았다.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1678년부터 밤베르크(Bamberg)지역의 특산맥주라고 했다. 설마 내가 맥주를 가릴 쏘냐. 한 모금을 벌컥 들이켰다. 맙소사. 내가 잔드라를 향해 한 말은 이랬다.

훈제연어를 마신 느낌이야.”

잔드라가 킥킥 웃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맥주를 만드는 맥아를 훈증해서 이런 별난 맛이 난다고 했다. 나는 별난 맛이 마음에 들었다. 바스티에게 고백하겠다는 마음이 푹 꺼져버린 자리에 자꾸 라우흐비어가 스몄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주량을 넘기고 석 잔을 마셔버렸다. 똑같이 석 잔을 마시고도 멀쩡한 잔드라의 팔에 매달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침대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에이, 타이밍도 하나 딱딱 못 맞춰.
에이, 기껏 용기를 냈더니.
에이, 안 해. 좋아하거나 말거나 안 해!

마음 속으로 실컷 ‘에이’를 연발하다가 가물가물 잠에 취했다. 그런데 부른다. 핸드폰이 아바의 ‘댄싱 퀸’을. 들러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고, 핸드폰을 찾았다.
“여보세요?”
아직 혀가 꼬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머리에 불이 번쩍 들었다. 한국에 있는 남동생의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