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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2DAY

[독일생활]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13, 파우스트(Faust)의 고민

2011년이 나흘 앞으로 다가온 날, 드레스덴(Dresden)에 사는 친구인 클라우디아로부터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뒤셀도르프(Düsseldorf)에 사는 고모가 여행 삼아 라이프찌히(Leipzig)를 방문하는데, 겸사로 클라우디아와 나를 식사에 초대했다는 소식이었다. 덕분에 클라우디아는 부랴부랴 라이프찌히행 기차를 탔고, 나는 친구의 고모를 만난다는 사실에 조금 긴장을 했다. 장소는 라이프찌히 시내에 있는 명물 레스토랑, 아우어바흐스켈러(Auerbachskeller)였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파우스트(Faust)'에 나오는 장면으로 유명한, 그러나 나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Die Deutschen lieben Bier!

아우어바흐스켈러 앞의 동상. '파우스트’의 한 장면을 연출해 놓았다

아우어바흐스켈러 앞의 동상. '파우스트’의 한 장면을 연출해 놓았다

"알트비어(Altbier)! 세상에, 독일에서 꼭 맛봐야 하는 맥주 중 하나란다.“
클라우디아의 고모는 음료를 고르는 수고를 확실히 덜어주었다. 아담한 체구에 짧고 곱슬거리는 갈색머리를 한 그녀는 악수를 나눈 첫 순간부터 „안나라고 부르렴.“이라고 친절히 말했다.
"뒤셀도르프의 특산맥주거든."
클라우디아가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슐뤠써 다스 알트(Schlüsser das Alt) 맥주

슐뤠써 다스 알트(Schlüsser das Alt) 맥주

옅고 투명한 갈색의 맥주를 통과해 복작거리는 레스토랑의 실내전경이 보였다. 흑맥주보다 훨씬 부드럽고, 보통 맥주보다 구수했다.
"어때?"
"무척 부드러워요. 무엇보다 색이 참 예쁘네요.“
 "그렇지?“
내 대답에 안나고모의 표정이 환해졌다.
맥주와 어울리는 작센(Sachsen)주의 전통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맥주와 어울리는 작센(Sachsen)주의 전통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소고기를 재료로 한 자우어브라텐(Sauerbraten)

소고기를 재료로 한 자우어브라텐(Sauerbraten)

구운 연어 요리

구운 연어 요리

마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이야기는 금방 무르익었다. 안나고모는 최근에 배우기 시작한 요가 얘기에 열을 올렸고, 클라우디아는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는 회사에서 알게 된 동료들에 관한 얘기와 평범한 생활의 지루함을 털어놓았다.
"네가 하는 공부는 어떠니? 독일어로 공부하기 어렵지 않아?"
안나고모가 물었다.
"공부도 어렵지만, 사람이 더 어렵죠."
반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안나고모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 사람만큼 어려운 게 어디 있니. 혹 그게 사랑이라면 더욱 그렇지."
안나고모가 레스토랑 한 쪽을 가리켰다.
"저길 봐."
와인 통에 앉아있는 메피스토펠레스

와인 통에 앉아있는 메피스토펠레스

"파우스트의 영혼을 파멸시키려고 했던 메피스토펠레스인가봐. 알지? 우주의 진리를 알고 싶어했던 파우스트를 꿴 악마 말이야."
안나고모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대학자였어. 철학, 의학, 신학에 이르기까지 말이지. 처음에 메피스토는 그에게 인간의 추악한 면을 보여주고 싶어했어. 그래서 여기 아우어바흐스켈러에 데리고 왔지. 하지만 술에 취해 엉망이 된 이 지하의 광경을 보고도 파우스트는 학자의 냉철함을 유지했어. 하지만 그 다음엔 어땠지?"
"마법의 약을 마시고 젊어지죠."
"그리고 사랑을 하지. 불쌍한 그레첸도 대학자였던 파우스트도 사랑 때문에 비극에 빠지게 돼. 미치거나 죽거나. 괴테도 알았던 거야. 사랑이 사람을 그렇게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사랑에 대해 힘주어 말하는 안나고모의 말에 의구심이 들었다. 문득 짚이는 데가 있었다. 나는 클라우디아를 돌아보았다. 클라우디아는 어깨를 한번 들었다 놓았다.
"너흰 젊으니까."
안나고모는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즐거운 시간이 지났다. 헤어짐에 앞서 안나고모는 "클라우디아랑 언제 한 번 뒤셀도르프에 오렴. 그땐 알트비어를 생맥주로 마시게 해줄게."라며 포옹을 해주었다. 나는 클라우디아를 역까지 바래다 주면서 슬쩍 물었다.
"안나고모한테 내 얘길 뭐라고 한 거야?"
클라우디아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단 바스티의 말이 궁금하지 않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차에 오르며 클라우디아가 말했다.
"너는 아직도 자기가 아닌가 보다라던데. 정말 그래?“
기차가 멀어졌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바보같이. 그가 내게 마음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나는 내 마음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