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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2DAY

[독일맥주] 달콤한 맥주, 쌉쌀한 맥주

  며칠 동안 비가 내리고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 했더니 금세 초가을 분위기다. 입추가 지나도록 삼십 도를 웃도는 한국과는 공기가 사뭇 다르다. 날씨가 선선하니 길거리에서 브라트부어스트(Bratwurst)를 사 먹는 사람들도 꽤 많이 늘었다. 토요일 오후, 마른 날씨가 좋아서 오전부터 내도록 시내를 쏘다녔다.
그러다 종소리가 빚어내는 예쁜 화음에 이끌려 어느 실내 쇼핑몰에 깊숙이 들어섰다. 동시에 부우우우- 휴대폰이 외투 주머니에서 진동한다. 나는 종소리에 취해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이작! 나야, 바스티! 잘 있었어?"
  익숙하고 반가운 목소리는 무려 2주간이나 연락이 끊기다시피 했던 바스티다.
  "바스티!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어디야?"
  "어젯밤에 도착했어. 시간 괜찮으면 잠깐 만날까?"
  "나 어차피 지금 시내야."
  "그럼 모서리카페에서 봐. 지금 출발한다! 아, 참! 야나도 같이 갈 거야!"
  야나가 누구냐고 물으려는 순간 전화가 뚝 끊겼다. 은근슬쩍 짐작이 가면서 호기심이 일었다.
두 줄로 달린 크고 작은 종들이 만들어낸 화음은 여전히 둥근 천장을 맴돌아 아름답게 울려 퍼진다. 바스러질 것 같은 햇살도 아니건만 왠지 눈이 시리다.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Die Deutschen lieben Bier!


맥주에 스프라이트 또는 콜라를 섞어 만든 라들러

맥주에 스프라이트 또는 콜라를 섞어 만든 라들러

  모서리를 돌자마자 은색 철제의자에 앉아 있던 바스티가 벌떡 일어섰다. 함빡 미소를 짓는 바스티는 이산가족상봉의 현장처럼 포옹한다. 전화 한 통 없었던 게 괘씸하기는 하지만 일단 안아준다. 자세히 보니 그는 보기 좋을 정도로 햇빛에 그을었다.
  "이작, 이쪽은 쾰른에서 만난 야나. 야나, 내 절친한 친구 이작이야."
  바스티는 차례로 소개했다.
"만나서 반가워."하고 악수를 청하는 아가씨는 어깨까지 오는 갈색 머리와 발그스름한 양 볼이 매력적이다. 통성명을 마치자 바스티는 늘 마시던 버릇대로 라들러(Radler)를 주문했다. 야나도 똑같은 걸 주문한다. 그러고는 둘이 좋다고 키득댄다. 귀여운 연인이구나. 눈이 시린 게 눈꼴시려고 그랬나 보다.
  "얘기 좀 해 봐. 둘이 어떻게 만났어?"
  내 몫으로 나온 흑맥주를 홀짝이며 물었다.
솜사탕 같이 포근한 거품과 쌉쌀한 맛이 사랑스런 흑맥주

솜사탕 같이 포근한 거품과 쌉쌀한 맛이 사랑스런 흑맥주

  "이작, 비어볼레(Bierbowle)를 알아?"
  "그게 뭔데?"
  "제조방법이 이래. 맥주 여섯 병을 큰 그릇에 쏟아 붓고, 거기에 체리 조금, 레몬즙 조금, 설탕, 그리고 차게 식힌 위스키를 섞는 거야."
  "하여튼 넌 섞어 마시는 맥주 참 좋아하는구나."
  내 말에 바스티는 장난기가 잔뜩 어린 표정으로 하하 웃었다.
  "세미나 끝나고 마음 맞는 친구들하고 그렇게 한잔하다가 야나를 만났지. 얘기가 잘 통하더라고. 야나도 너처럼 싸구려 간의 소유자라 많이 마시질 못해."
  간단한 요깃거리로 시킨 뷔어쯔플라이쉬(Würzfleisch)가 나왔다. 바스티는 곁들여 나온 토스트 두 쪽 중 하나를 당연한 듯 야나에게 밀어주고, 남은 하나를 반으로 잘라 나에게 내민다. 왠지 심술이 돋는다.
간단한 요기거리 뷔어쯔플라이쉬(Würzfleisch)

간단한 요기거리 뷔어쯔플라이쉬(Würzfleisch)

뷔어쯔플라이쉬(Würzfleisch) : 닭고기나 생선살 등을 잘게 썰어 밀가루와 양념을 넣고, 그 위에 치즈를 얹어 오븐에 굽는다. 치즈 아래는 닭죽과 맛이 거의 비슷하다. 60년대 후반 이후로는 일반적으로 토스트가 곁들여져 나온다. 대표적인 동독음식이며, 프랑스에서는 라구(Ragout)라고 한다.

  "흠. 그러고 보니 네 말이 맞네. 그렇게 섞어 마시는 맥주는 달콤한 맛이 좋잖아."
  바스티는 바삭한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이작은 쌉쌀한 맥주를 좋아하나 본데?"
  야나가 생글거리며 끼어든다.
  "맥주만 그런가. 이작 이 친구는 대체적으로 쌉쌀한 음식을 좋아해."
  바스티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지만은 않다고 대꾸하려는데 카페 입간판이 눈에 걸렸다.
01

독일어 해석: ‘달콤한 게 당겨요?(Lust auf Süßes?)’ 우유에 쌀을 넣어 달콤하게 끓인 밀히라이스(Milchreis), 사과를 넣어 만든 페스트리인 압펠슈트루델(Apfelstrudel), 초코렛무스(Mousse au chocolate).

  모두 가끔 먹기는 하지만 즐기지는 않는 음식이다. 생각해 보니 맥주도 그렇다. 평소에 다양하게 맛을 본다고 이것저것 시켰어도, 막상 아무 계획 없이 마시고 싶은 맥주를 고를라 치면 항상 오늘처럼 쌉쌀한 흑맥주를 시키게 된다. 문득 '바스티가 날 이렇게 잘 알고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온 말이 결정타를 날렸다.
  "이작은 글도 즐겨 쓰는데, 달콤한 로맨스보다는 쌉쌀한 자기성찰의 글을 주로 써. 그렇지?"
  동의를 구하는 바스티에게 나는 "으응……"하고 대답을 흐렸다. 그렇구나. 나는 쌉쌀한 맛을 좋아하는구나. 전혀 깨닫지 못했던 나의 일면이다.

  우리는 지난번 클라우디아의 생일 때 드레스덴을 방문했던 얘기며, 바스티가 날마다 한군데씩 쾰른의 브라우하우스(Brauhaus; 원뜻은 맥주양조장이지만 대게 선술집을 겸함)를 공략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 와중에 야나가 콧소리로 "비어 비어 비어~"하고 노래를 불렀다. 바스티가 살짝 취하면 곧잘 부르는 노래를 제대로 흉내 낸다. 그녀의 구김살 없는 모습에 깔깔 웃음이 터져버렸다. 더불어 꽁꽁 닫혔던 내 마음도 차츰 누그러졌다.
  "우리, 야나 돌아가기 전에 다음 주말쯤 공원에서 그릴하자. 마쿠스도 부르고"
  해 그림자가 길어지고, 헤어지려는 즈음에 바스티가 제안했다.
  "그래, 그럼 나도 요리실력 발휘 좀 해야겠는걸. 잘 가."
  나도 즐겁게 약속했다.
  빨간 불. 신호등 대기에 멈추어 기다리는 동안 뒤를 돌았다. 반대편으로 저만치 장난을 치며 걸어가는 바스티와 야나의 모습이 달콤하고 행복해 보였다.
나는 달콤함을 느꼈던 적이 언제였더라?
갑자기 자조 섞인 생각이 밀려들었다. 쌉쌀한 맛도 나쁘진 않지만, 꼭 나만 멈춰서 진부한 맛을 고집해 온 느낌이다.
그러다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길어봐야 몇 분. 어차피 신호등은 초록불로 바뀌기 마련이다. 지금은 잠시 멈춰서 '지금 이대로의 쌉쌀함이 좋아.' 고집을 부려도 괜찮겠다 싶다.

잠깐 지나쳐도 될 상식
야나가 바스티를 흉내 냈던 노래 "비어 비어 비어(Beer Beer Beer)"는 Rob Manuel과 Daniele Davoli의 노래인데요, 흥겹고 가사가 간단해서 맥주를 사랑하는 여러 사람이 애창할 만한 귀여운 노래랍니다. 영화 아메리칸 파이(American Pie)의 삽입곡으로도 쓰였군요. 우리도 함께 불러볼까요?
>>노래 들으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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