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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2DAY

[독일맥주] 환상적인 경기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핸드폰이 또 부른다. 아바의 댄싱퀸을.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는 십여 초 동안, 멈춰있던 머릿속에 희미한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일년 육 개월째 저 벨소린데 바꿀 때가 되었나 보다, 눈꺼풀이 무거운 건 어젯밤에 먹고 잔 떡볶이 덕분이겠지, 한국대표팀의 첫 승을 자축하는 승리의 떡볶이, 무자비한 한국인 친구 셋이 애지중지 지켜온 나의 냉동실을 털었지, 아! 아까운 내 쌀떡볶이, 부산오뎅, 냉동만두야.
“할로.”
잠긴 목소리가 겨우 나온다. 그러게 나이를 생각해서 작작 소릴 질렀어야 했다.
“축하해, 이작. 어제 한국팀 정말 잘 하더라.”
“바, 바스티?”
“응.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래, 아프다. 일요일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 오랜만의 늦잠을 설치게 만든 너 때문에 이 누나는 마음이 심히 아프다. 마음속으로 쫑알거리며 꼬물대는 애벌레처럼 이불을 헤치고 일어나 앉았다.
“바스티, 오늘 일요일인데.”
“그래서 전화했어. 있다가 오후에 거리응원 안 갈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6월 13일. 독일과 호주의 경기가 있는 날이다.
“몇 시에 어디?”
열성적인 거리응원이야 말로 축구경기의 백미가 아니던가.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Die Deutschen Lieben Bier!
“너무 일찍 온 거 아냐?”
나는 흑맥주를, 바스티는 라들러를 큰 잔으로 주문하고 한 카페의 야외좌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저녁 여섯 시 반. 경기를 두 시간이나 앞뒀다. 전광판이 설치된 무대 아래서 방송장비를 점검하는 아저씨들이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거리는 아직까지 한산하다
“모름지기 좋은 자리는 먼저 맞는 사람이 임자야.”
출출하다던 바스티는 맥주 외에도 카르페제 샐러드를 시켜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를 썰어놓은 위에 잘게 다진 바질과 올리브오일, 발사믹 식초를 뿌려먹는 카르페제 샐러드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를 썰어놓은 위에바질과 올리브오일, 발사믹 식초를 뿌린 카르페제 샐러드

독일의 거리응원엔 사연이 있다. 2006년 개최국이었던 독일은 2002년 한국에서 펼쳐진 거리응원전에 깊은 감명을 받아 ‘팬페스트(Fanfest)’라는 계획을 세웠었다. 같은 거리응원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에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는데, 도시마다 빠지지 않는 넓은 광장에 응원구역을 지정해서 전광판을 세우고, 주변에는 간단한 먹거리와 맥주를 파는 가판이 섰었다. 경기장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남녀노소 함께 모여 시청을 했고, 규모에서는 한참 작아도 열기만큼은 참 대단했다. 2010년에도 독일인들은 그 열기를 잊지 않았다. 비록 팬페스트 때처럼 국가적인 차원은 아니었지만, 카페가 밀집되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전광판이나 대형텔레비전이 설치되었다. 듣자 하니 굴지의 자동차 회사의 협찬으로 대형전광판을 세운 곳도 있다고 한다.
무릎팍도사 바스티다! 부부젤라 소리가 드문드문 들린다 했더니 경기를 한 시간 정도 남겨놓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무대 위의 언니들은 디제이의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뒤로 밀렸다.
아빠 어깨 위에 목말을 탄 꼬맹이도 볼에는 검정, 빨강, 노랑 세 줄로 색칠을 하고, 머리에는 작은 국기를 꽂았다. 삽시간에 거리는 발붙일 틈 없이 붐볐다. 바스티가 어깨를 으쓱하고 씩 웃는다.
디제이의 음악이 끝나고 전광판에 경기장이 등장하자, 일대는 “도이칠란트- 도이칠란트-”하는 응원가로 가득 찼다. 거리응원에 먹거리, 마실 거리가 빠질 리 없다. 가판에서 생맥주를 파는 손길과 소시지를 굽는 손길이 더욱 바빠졌다.
독일의 국가가 나오는 동안은 분위기가 잠시 숙연했다. 그러나 함께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은 경기가 시작되자 서서히 끓어오르는 물처럼 흥분했다. 그리고.

“토-어!!”
전반 8분. 루카스 포돌스키의 첫 골이 터졌다. 독일어로 “골!!”을 외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금새 사람들의 함성에 묻혀버렸다. 바스티도 나도 제자리서 껑충껑충 뛰며 소리를 질렀다. 첫 골의 느낌 그대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독일대표팀은 환상적인 대승을 거뒀다. 거리는 온통 승리의 감격이 넘실거렸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바스티와 나는 집으로 향했다. 깔깔하게 목쉰 소리로 바스티가 말했다.
“이작, 아침에 네 목소리. 아픈 게 아니었겠구나.”
나는 검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대꾸했다.
“목소리를 아껴 둬. 다음 경기에도 응원해야지.”
밤바람이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