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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E 2DAY

일품칼럼 EP.01✍️ 주류문화 칼럼니스트 명욱, "천천히 시간을 두고 마셔야 하는 술"

 

2017년 증류식 소주*  애호가들에게는 슬픈 소식이 하나 들려왔다. 바로 '일품진로 10년 숙성' 제품이 단종된다는 것. 우여곡절을 겪으며 2007년 센세이셔널하게 등장한 '일품진로 10년 숙성'은 숙성 원액 부족으로 더는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

 

*증류식 소주란?

주정에 물과 감미료를 넣어 만든 희석식 소주와 달리 직접 발효 및 증류를 진행하는 소주. 희석식 소주와 달리 원재료가 확실하고 각각 재료의 풍미를 담고 있는 한국식 프리미엄 소주다.

 

일품진로의 탄생

일품진로는 뜻하지 않게 세상에 등장했다. 1996년 프리미엄 주류 시장이 도래할 것이라고 본 진로 경영진은  '참나무통 맑은소주'라는 한 등급 위의 소주를 출시했다. 바로 일반 소주에 직접 쌀로 발효 및 증류하여 목통에서 숙성시킨 증류식 소주를 넣어 판매하기 시작한 것. 호기롭게 시작하였으나 진행이 쉽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가 왔다.

 

결국 해당 제품은 2000년에 생산 중지가 되었다. 문제는 '참나무통 맑은소주'에 넣기 위해 만들어 놓은 목통 숙성 원액. 오갈 데가 없던 이 숙성원액은 무려 7년간을 더 목통 속에서 기다림을 가지게 된다. 마치 때를 기다리던 수행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10년의 수행을 마치고 내공이 가득해진 2007년,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목통 숙성 증류식 소주 원액의 일부만 넣은 '참나무통 맑은 소주'와 달리 원액 100%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일반 소주의 출고 가격은 375ml가 897원. 그리고 일품진로의 출고가는 9,400원이었다. 무려 10배나 비싼 상황이니 소비자가 쉽게 지갑 문을 열지 않았다.

 

진가는 시간이 증명한다

하지만 진가는 시간이 해결해 주는 법.  시대의 트렌드에 맞춰 몇 번의 리뉴얼을 거친 일품진로는 위스키 및 와인 애호가, 미식가 중심으로 점점 그 가치가 알려졌고, 너무 잘 팔린 나머지 원액이 바닥을 드러내 출시 10년 후인 2017년도에 단종되어 버린다.

 

일품진로의 재탄생

이러한 상황에서 그다음 해인 2018년 희소식이 하나 들려온다. 일품진로가 부활한다는 것이다. 6개월 이상 숙성을 거쳐 탄생한 일품진로 1924. 이후 1924가 빠지면서 새 단장을 하게 되는데, 그립감이 좋게 세로줄이 양각으로 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뚜껑이 매우 커졌다. 여기에 마치 크리스털과 같은 디자인은 제품의 격을 한 층 더 업그레이드해 줬다고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1996년도에 증류한 원액과 원료가 다소 다르다는 것이다. 90년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쌀로 술을 빚는다는 것은 엄청난 사회적 비판이 있었다. 쌀의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된 지 10년이 채 안 되었기 때문이다. 쌀로 술을 만든다는 것은 엄청난 과소비였고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의 일품진로 원액은 수입 쌀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등장한 일품진로는 명백한 국산 쌀. 그것도 슈퍼 프리미엄급인 '일품진로 1924 헤리티지'의 경우는 고급 쌀의 대명사인 이천 쌀로 발효 및 증류를 한 제품이다.

 

일품진로 3종의 공통분모는?

그런 의미로 일품진로 3종을 맛볼 수 있었다. 가장 스탠더드인 '일품진로'와 '일품진로 오크43', 그리고 앞서 언급한 '일품진로 1924 헤리티지'다.

 

해당 3종의 공통분모는 모두 쌀로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특유의 군내가 적은 클린(Clean)한 맛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증류 시 처음 나오는 초류와 후류의 분리를 잘했다고 볼 수 있다. 발효주를 증류하면 초기 단계에 나오는 증류액을 초류라고 부르는데 끓는점이 낮은 점에서 증류되는 물질로 메틸알코올, 아세트알데하이드 등이 극미량 존재하기도 한다. 후류는 마지막에 나오는 증류액으로 탄내의 주성분이자 군내 및 잡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제 막 증류된 증류 원액에는 지방산 등 여러 불순물이 있기도 한데, 냉각을 통해 이러한 불순물을 한데 모이게 한 이후에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더욱 깨끗한 맛의 증류주를 추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것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을 시절에는 소주 윗부분을 버리고 마시곤 했다. 지금도 소주의 목을 치는 이유가 소주 제조 기술이 부족했을 때 불순물을 제거하는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초류와 후류를 제거하는 방식 및 냉동 여과 공법은 타 업체도 진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품진로의 맛이 더욱 클린하게 느껴진 것은 100년 역사의 노하우를 통해 잡아놓은 세부적인 기준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일품진로

 

가장 스탠더드 모델인 일품진로의 이미지는 어린 시절 추억 속의 눈이었다. 새벽에 내린 함박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 하얘진 순간. 아무도 없는 곳을 나 혼자 걸어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뽀득거리는 눈을 밟는 백색 소음. 그 뽀득거리는 소리가 마치 일품진로가 주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향미로 느껴진다.

 

은은한 단맛은 이 술이 쌀로 만들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며, 전천후로 음식과 잘 어울릴 듯한 이미지를 줬다. 굳이 잘 어울리는 안주를 고른다면 문어숙회, 낙지 연포탕, 대구 지리가 좋게 느껴졌다. 자극적인 것보다는 담백한 음식이 술맛을 방해할 것 같지 않았다.

 

얼음에 넣어 마시니 더욱 부드러워졌다. 다만 일품진로를 처음 접한다면 첫 잔은 꼭 스트레이트로 즐겨보기를 추천해 본다.

 

일품진로 오크43

 

12년 목통 숙성 원액이 들어간 일품진로 오크43도 눈이 느껴진다. 이곳은 눈이 푹 쌓인 설산이다. 그 설산엔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이 있고 양쪽에는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킨 참나무가 펼쳐져 있다. 살짝 바람이 불어 눈이 떨어질 때, 바람 사이로 기다림을 극복한 참나무 향이 살짝 코끝을 스치며 지나간다. 70년 넘은 오랜 수령의 나무에서 나오는 여유 있는 느낌으로 말이다.

 

이 술은 해산물과 잘 어울린다. 담백한 회보다는 오히려 숙성 회, 숙성 초밥의 진한 맛이 잘 어울린다. 신선한 생선회와 즐긴다면 고등어회, 꽁치회와 같이 등 푸른 생선이 좋다. 여기에 생굴에 과메기 등 특유의 맛이 있는 해산물은 더욱 멋진 조합을 끌어낼 것이다.

 

생뚱맞지만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같이 마셔도 재미있는 조합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둘은 마구 섞으면 안 된다는 것. 살짝 묻히는 느낌으로만 가는 것이 포인트다. 아이스크림 9, 일품진로 오크43은 1 비율이 좋을 듯하다.

 

 

 

온더록스로 마셔보니

멋진 설산 속의 호수가 그려졌다.

은은한 나무 향, 그리고 추운 겨울 호수에서

느껴지는 차지만 맑은 바람.

춥지만 상쾌하게 느껴지는 그런 바람이다.

 

 

 

일품진로 1924 헤리티지

 

일품진로 1924 헤리티지는 알프스 산맥의 빙하를 덮은 눈이다. 짜릿하게 맑은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서 수천 년을 기다려온 새하얀 풍광만이 보인다. 그리고 그 눈을 손에 한 움큼 쥐고 먹어보니 살포시 단맛이 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느낌처럼 말이다. 처음 개장한 스케이트장에서 첫 번째로 달리는 것처럼 그 어떠한 방해물도 입속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얼음에 넣어 온더록스로 마셔봤더니 이번에는 빙하가 녹는 이미지다. 그것도 너무 깨끗한 나머지 푸른색으로 보일 정도다. 목이 말라 마셔봤더니 수만 년의 시간을 거쳐 여과된 순수한 맛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리고 한마디 감탄이 나온다. 소주가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깨끗한 맛이 이것이 아닌가 싶었다. 알코올 도수 30도라는 고도주인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퓨어(Pure) 그 자체였다.

 

함께 먹고 싶은 음식은 쫀득한 랍스터회와 담백한 영덕 대게찜, 화이트와 핑크가 교차하는 부드러운 참치 뱃살, 담백함과 고소함이 공존하는 성게알, 단맛이 은은히 감도는 단새우회, 탱글과 쫀득한 식감이 함께 있는 독도 새우 등을 언급하고 싶다. 육류로는 냄새가 과하지 않은 베요타 등급의 이베리코 돼지고기, 샤토브리앙이라고 불리는 부드러운 한우 안심구이 등도 잘 어울리는 조합일 것이다.

 

좋은 증류식 소주를 마실 때는

온더록스에 들어가는 것은 술과 얼음뿐이다. 그래서 얼음을 잘 써야 더욱 맛있다. 단순한 수돗물로 얼린 얼음은 오히려 마이너스다. 최소 정수된 물 또는 생수, 그중에서도 연수를 찾아 얼려야 한다.

 

또 하나 무조건 첫 잔은 음식 없이 맛을 봐야 한다. 처음부터 음식을 먹는다면 입속의 음식 맛이 오히려 순수한 술맛을 느끼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만큼 감상과 음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벌컥벌컥 마시기에는 술이 너무 아깝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마셔야 하는 술이며, 맛을 즐긴 이후에 음식과 즐기는 것을 추천한다.

 

일품진로 라인업은 한국 소주 역사의 또 다른 지평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클린과 퓨어가 있다.

 

여기에 국산 쌀과 지역 쌀을 사용, 사회적 가치까지 담았으며, 숙성이라는 시간의 가치도 품었다.

프리미엄 한국 소주의 기준을 한층 더 올려준 일품진로의 모습, 앞으로 더욱 가치 있는 우리 소주를 만들어 주기를 기대해 본다.

 

 

경고 : 지나친 음주는 뇌졸중, 기억력 손상이나 치매를 유발합니다. 임신 중 음주는 기형아 출생 위험을 높입니다.

 

 

명욱 칼럼니스트

- 세종사이버대학교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

- 전 숙명여자대학교 미식문화 최고위 과정 주임교수

- ‘술기로운 세계사’, '말술남녀',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 등 주류 전문 서적 저자

- 백종원의 '백스피릿‘ 통합 자문위원

- 2014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표창

- 2013년 한국관광공사 창조관광 공모전 최우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