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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icious 2DAY

[독일맥주] 오래도록 곁에 있는 그 사람, 그 맥주

뜨겁다. 입안이 바짝 마른다.

가을로 들어서는 문턱에서 나는 그만 감기에 함빡 들어버렸다. 아이고, 머리야. 아이고, 목이야, 혼자 끙끙 앓으려니 처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텅 빈 방에 덩그러니 누워 ‘세상에서 제일 아픈 병은 어쩜 암 같은 중병이 아니라 혼자라는 느낌일 거야’ 한탄하다가 선잠에 들었다. 멀리 부모님의 얼굴이, 한국에 있을 절친한 친구들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감은 눈에서부터 생긴 아릿한 기운은 코끝을 찡 울리고 사라진다. 결국 혼자라는 느낌은 감기처럼 내성이 짧다.

딩동.

누군가 벨을 눌렀다. 그런데 만사 귀찮으니 깨기가 싫다. 귀찮아서 무시하고 싶은데 잠결에도 배는 고프다. 아플 땐 좀 허기가 안 들면 안 되나, 오장육부조차 원망스럽다. 다른 가녀린 처자들처럼 우아하게 아프고 싶다는 생각은 정말이지 희망에 불과하다.

딩동 딩동.

그 누군가가 계속 벨을 누른다. 돌아갈 생각이 없나 보다. 룸메이트들이 열쇠라도 놓고 나갔나 싶었다. 하는 수 없이 끙 하고 일어나 추레한 몰골을 대충 수습했다.

"누구세요?"

훌쩍. 코를 비비고 문을 열었다. 예상외로 문밖에 서있는 그는 내가 좋아하는 이다.

"도서관도 안 나오고, 하루 종일 전화도 안 받고. 집에서 뭐해? 어, 너 어디 아파?”

그가 걱정스런 얼굴로 이마를 짚는다. 괜히 눈물이 핑 돈다.

아마도 피부는 푸석푸석하고, 다크서클이 판다처럼 생겼겠지만, 아마도 머리는 산발이고 슬리퍼도 짝짝이로 신은 것 같지만, 별로 창피하지 않다.

"바스티, 나 배가 고파.”

그는 내 친구니까.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Die Deutschen lieben Bier!

저녁햇살이 따듯하게 내리쬐는 비어가르텐(Biergarten)은 음식을 즐기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기차모양의 미끄럼틀을 타고 노는 아이들이 몇, 왁자지껄하니 담소를 나누며 맥주를 마시는 무리가 여럿이었다.

"역시 집에서 닭고기수프나 끓여먹는 게……”

주문을 하고 나서도 바스티는 영 마뜩잖은 표정이다.

"나는 이게 먹고 싶었어.”

커다란 고깃덩이가 내 앞에 턱 놓였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요리는 막힌 코도 뻥 뚫어놓는다. 도리 없는 고기중독자, 한∙중∙일∙서양음식을 막론하고 종류별로 먹고 싶은 고기요리가 항상 다섯 가지는 되는 나로선, 이까짓 감기쯤에 왕성한 식욕이 꺾이지 않는 게 분명하다.
흑맥주 소스로 구운 크누스프리게 슈바이네학세(Knusprige Schweinehaxe) : 우리말로 ‘바삭한 족발구이’ 정도가 될 듯 하다. 감자반죽을 소금물에 쫀득하게 삶아낸 카토펠클로쓰(Kartoffelklöße)와 양배추를 새콤달콤하게 절인 바이쓰크라우트잘라트(Weißkrautsalat)가 곁들여졌다.

"고기는 그렇다 쳐도 맥주는……"

주문한 샤프너(Schaffner)와 하이쪄(Heizer)가 연이어 놓였다. 맥주잔에 송골송골 맺혔던 물기가 한 순간에 조로록 흘러내린다.

"감기 걸렸을 때 미지근한 맥주를 마시는 민간요법도 있다잖아. 요는 알코올이 혈류에 빨리 섞여서 몸을 덥혀주는 역할을 하고, 결과적으로 잠을 푹 자게 만들어서 감기를 떨친다는 건데, 그럼 차가운 맥주도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 뭣보다 여기까지 왔는데 맥주를 마시지 않고 가기엔 좀 아쉽잖아."

"아이고, 그래. 핑계도 나름이지만 뭐, 지나치지 않으면."

주절주절 우기는 말이지만 바스티는 내 고집을 받아주었다.
매표원이라는 뜻의 샤프너(Schaffner)와 증기기관에 연료를 공급하는 사람을 일컫는 하이쪄(Heizer)

매표원이라는 뜻의 샤프너(Schaffner)와 증기기관에 연료를 공급하는 사람을 일컫는 하이쪄(Heizer)

그도 그럴 만했다. 우리가 찾은 레스토랑, 바이리셔 반호프(Bayrischer Bahnhof)는 직접 만든 맥주로 유명한 곳이었다. 1800년대 중반에 이곳은 라이프치히(Leipzig)와 알텐부르크(Altenburg)를 잇는 철도가 놓인 기차역이었는데, 역사 안에 맥주양조장을 겸한 식당이 있었다. 그 구간을 오가던 증기기관차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맥주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았다. 거의 이백 년간 전통방식을 꾸준히 이어 내려온 맥주는 오히려 그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곁에서 즐거움을 나누는 매개체가 되었다.
건물 내부에서는 지금도 이백 년 전처럼 맥주를 만드는 기관을 엿볼 수 있다

건물 내부에서는 지금도 이백 년 전처럼 맥주를 만드는 기관을 엿볼 수 있다

덕분에 이곳에서 만든 맥주에는 필스(Pils), 흑맥주, 바이쓰비어(Weißbier; Weizenbier)가 각각 샤프너(Schaffner), 하이쪄(Heizer), 쿠플러(Kuppler; 기차의 차량을 연결하는 사람)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역무원 아저씨가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키는 모습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자, 이제 먹자."

누가 친절한 바스티씨 아니랄까봐, 그는 크누스프리게 슈바이네학세를 먹기 좋게 썰어주었다. 나도 손이 한가하지만, 아픈 김에 응석부리는 셈치고 내버려두기로 했다. 은근히 기분이 좋다.
학세(Haxe) : 아이스바인(Eisbein)이라고도 하는 요리의 주재료는 돼지고기의 정강이와 발목 사이 부위를 의미한다. 살코기가 많은 이 부분을 소금간 한 후에 삶거나 오븐에 구워먹는다. 껍데기를 떼지 않고 그대로 요리해서, 우리나라의 돼지 족발이 쉽게 연상된다.

"이거 다 먹고 대신 아프지 마."

바스티의 말에 먹기만 하던 나는 문득 쑥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오랜 친구간이래도 닭살이 좀 돋을만한 말투다.
"에이, 누가 들으면 중병이라도 걸린 줄 알겠네. 감기야 시간이 지나면 금방 나아지는걸."

피식 웃는 나를 따라 그도 웃는다.

사실은 고마웠다. 한 차례씩 앓고 지나가는 감기도, 감기가 데려 온 외로움도, 한결 수월하게 이겨낼 수 있도록 항상 곁에 있어준 그가 고마웠다. 그런데 당연한 말도 오늘 같은 때는 용기가 필요한 모양이다.

"고마워."

"뭐가?"

"아니, 그냥 다."

맥주잔을 들고 멋쩍게 웃는 내게 바스티는 "프로스트(Prost)!"를 외쳤다. 항상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나는 겨우 들릴락말락 작게 속삭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