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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2DAY

[독일맥주]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11. 쾰쉬와 프랑크푸르터

비는 어제도 내렸고, 그제도 내렸다. 하늘은 오늘도 우중충한 회색빛이니까, 또 비가 오리라는 예상이 충분히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산을 준비한다. 애써 신경 쓴 머리스타일을 망친다거나, 노트북컴퓨터가 젖을까 점퍼 속에 우겨 넣는 불상사를 미리 방지할 수 있으니, 예상할 수 있는 날씨에 감사해야겠다.
  거리엔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바이나흐츠마르크트(Weinachtsmarkt, 크리스마스시장)에 쓰일 통나무 상점들이 설치되었다. 작년에도 혼자였고, 재작년에도 혼자였으니까, 올해도 역시 홀로 크리스마스를 보낼 일이 쉽게 예상된다. 로맨틱한 사건이 생긴다면야 좋겠지만, 갑자기 내 인연이 딱 나타나리란 보장도 없다. 그러니 미리미리 약속도 많이 잡아놓고, 재미있는 일들을 계획해야겠다. 예상할 수 있는 외로운 크리스마스에 감사해야…… 할까?
  그러고 보면 세상살이가 다 그렇다. 나쁜 일도 예상하면 적절히 대비하고, 적절히 대비하면 적어도 조금은 재미있어진다. 그런데 항상 예상 가능한 일만 일어나진 않는다. 예상이 가능하지 않은 때 급작스레 일어난 일은 대게 아주 기쁘거나, 혹은 아주 슬프다.
독일인은 맥주를 사랑해!
Die Deutschen lieben Bier!

  “집 앞인데, 들려도 돼?”
바스티가 전화를 했다. “그럼.”이라고 대답한 지 삼분이 채 되지 않아 벨이 울렸다. 바스티는 양손에 맥주 한 병씩을 챙겨 들고 나타났다. 쾰쉬(Kölsch)다.
  "어서 와. 식사는?“
  "아직 전인데.“
우산도 없이 흩뿌리는 가랑비를 맞은 모양이다. 바스티는 축축하게 젖은 윗옷을 의자 위에 턱 걸쳐놓았다. 표정이 밝지 않았다.

어쩐 일이지. 나는 주섬주섬 저녁을 챙기며 눈치를 봤다. 마침 만들어놓았던 완두콩수프(Erbsensuppe)가 넉넉히 있었던 지라, 부어스트(Wurst)만 송송 썰어 넣었다.
완두콩수프 : 황색 또는 녹색의 완두콩을 물에 불려 익힌 다음, 육수를 붓고 베이컨이나 작은 부어스트(Würstchen), 감자, 양파 등을 넣어 끓인 스튜(Eintopf, 아인토프) 요리

  "원거리 연인 사이에 열정이 식는 건 치명적이야. 어느 날 상대가 멀리 떨어져있음을 깨닫게 되니까.“
바스티는 맥주를 따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쾰른(Köln)지역에서 생산되는 맥주, 쾰쉬(kölsch)

쾰른(Köln)지역에서 생산되는 맥주, 쾰쉬(kölsch)

긴 설명이 없어도 나는 쾰른에 사는 바스티의 그녀, 야나 얘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 그냥.”
바스티의 대답이 맥주 맛처럼 쌉쌀했다. 나는 바스티가 다시 말을 꺼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만날 때는 늘 최선을 다해. 그러니까 만나면 똑같지. 그런데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처음엔 만나는 횟수가 줄고, 그 다음엔 통화하는 횟수가 점점 뜸해져.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게 수순이겠지.”
  “자주 만나지 못해도 애틋하잖아. 서로 노력하면…… 멀리 떨어져 있다고 다 그렇진 않아.”
나는 바스티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물론. 하지만 종종 그래. 멀어서 꼭 필요한 때에 곁에 있을 수 없으니까, 마음에도 틈이 생겨.”
그는 힘 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차갑게 식힌 맥주는 목구멍을 간질이며 넘어갔다. 창 밖엔 어둠이 가라앉았다. 비가 오지 않았더라도 오후 세 시면 낮달이 뜨는, 긴 겨울의 시작이었다. 바스티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쓸쓸해 보였다.
  “야나가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온 남자 동료를 소개한 적이 있어. 직장에서 친하게 지낸다고. 그때 예상했어야 했는데.”
벌써 일이 벌어졌구나, 느낌이 왔다. 오늘의 맥주로 쾰쉬를 택한 그의 속내를 알만 했다. 괜히 완두콩수프에 썰어 넣은 프랑크푸르터 뷔어스트헨(Frankfurter Würstchen)조차 눈에 거슬렸다. 나는 바스티가 창 밖을 내다보는 사이 유리병을 치워버렸다.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이런 때에 굳이 다른 말이 필요할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저 바스티의 빈 잔을 채우고 말했다.
  “마시자.”
바스티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도 잔을 맞부딪치며 말했다.
  “그래, 마시자. 좋아했던 만큼 잊지 않을게. 안녕, 쾰쉬.”

잠깐! 지나쳐도 될 상식

본문 중 쾰른(Köln)지역의 특산맥주, 쾰쉬(Kölsch)는 독특한 음주문화로도 유명한데요, 우선 8도에서 10도 사이를 유지하는 온도가 중요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마시는 컵의 특별함을 꼽을 수 있습니다. 쾰쉬글라스(Kölschglas) 또는 슈탕에(Stange)라고 부르는 이 컵은 높이가 15센티미터 정도 되는 가는 원통모양의 유리컵입니다. 쾰쉬맥주집인 쾨베스(Köbes)에서는 쾰쉬글라스가 비면 묻지 않고 새 잔을 내온다고 하는군요. 그만 마시고 싶을 땐 맥주잔받침을 컵 위에 올려놓거나 계산서를 달라고 하면 된답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이 단체로 쾰쉬를 즐길 때는 10리터짜리 나무맥주통인 피터멘헨(Pittermännchen)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직접 나무통에서 따라 마시는 것도 무척 재미있을 것 같군요.